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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28 《밝은 밤》, 최은영, 한국소설, 장편소설 그는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얼어붙은 강물이라는 말을 즐겨 했다. 시간은 환상일 뿐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다가 눈물이 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근래 눈물을 흘린 적이 있던가. 눈물을 자주 흘리지 않는 내게, 특히나 더 건조해져버린 요즘같은 날씨에 이 책은 다시 예전의 나로 잠시 돌아가게 만들어줬다. 최은영의 밝은 밤은 ‘한 사람의 삶’이라기보다 ‘여러 세대의 삶이 어떻게 다음 사람에게 건너가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야기의 힘은 사건의 급격한 반전에서 오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오래 지속되는 것들—가난, 돌봄, 상실, 생존,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우정과 연대—이 인물들의 시간을 촘촘히 엮어낸다. 이 책은 지연이 희령으로 내려가 할머니와.. 2025. 12. 24.
책 리뷰 27 《Black Skin, White Mask 검은 피부, 하얀 마스크》, 프란츠 파농, 철학, 흑인 철학 As long as the black man remains on his home territory, except for pretty internal quarrels, he will not have to experience his being for others. There is in fact a being for other, as described by Hegel, but any ontology is made impossible in a colonized and acculturated society. 흑인이 자신의 고향 땅에 머무르는 한, 사소한 내부적 다툼을 제외하면, 그는 타인을 위한 존재로서의 자기 존재를 경험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헤겔이 말한 것처럼 타인을 위한 존재가 존재하지만, 식민화되고 동화.. 2025. 12. 24.
책 리뷰 26 《숲은 생각한다》,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 에두아르도 콘, 철학, 인류학 우리 인간이 창조한 세계이자 특유의 의미들로 가득하고 도덕으로 넘쳐나는 세계(이 우주에서 우리만은 예외라고 느끼게 만드는 독특한 세계)에 관한 민족지적 기록 작성에 능통한 우리들?은 이처럼 낯설고 인간적이지 않은 창조물을 그러나 동시에 너무 인간적인 창조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숲은 생각한다》는 이상한 책이다. 숲이 생각한다는 명제를, 숲이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명제로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기이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숲이 생각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숲이 생각한다는 사실의 산물이라는 것. 사고가 인간의 특권이라는 오래된 습관이 잠깐 흔들리고, 흔들린 틈으로 숲이 들어온다. 나는 이 책을,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게 만드는 민족지로 읽었다. 그런데 그 민족.. 2025. 12. 23.
책 리뷰 25 《토성의 고리》, W.G.제발트, 해외소설, 장편소설 토성의 고리는 적도 둘레를 원형궤도에 따라 공전하는 얼음결정과, 짐작하건대 유성체의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과거에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 이미지가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를 읽는 내내 붙잡고 놓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이 책이 결국 세계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보이는 형태에는 이미 파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 역시 멋지게 비상하는 곡선이 아니라 어느 자오선에 도달한 뒤 암흑으로 하강하는 궤도에 더 가깝다. 실제로 내가 침대에 누워 볼 수 있던 세상이라고는 창틀 안에 갇힌 무채색의 하늘조각이 전부였다. 제발트는 영국 동부 서퍽(Suffolk.. 2025. 12. 23.
책 리뷰 24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해외소설 잘 들어요. 나는 빵장수일 뿐이라오. 다른 뭐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소. 예전에, 그러니까 몇십 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을지 몰라요.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일들이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 어쨌든 내가 어땠건 이제는 더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거요. 지금은 그저 빵장수일 뿐이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일들의 변명이 될 순 없겠지요. 그러나 진심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카버의 작품 중에서도 유독 “열려” 있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그의 초기 단편들이 대개 단절과 궁핍의 공기를 단단히 잠가두는 방식이었다면, 이 작품은 끝내 어떤 틈을 남긴다. 그 틈은 거창한 구원이나 화해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감각이 아주 잠깐 다른 사람에게 접속되는 순간에서 생긴다. 그래서 영어권 리뷰들은 대.. 2025. 12. 22.
책 리뷰 23 《다와다 요코: 몸과 사잇공간의 시학》, 정항균, 상상해낸 민족을 묘사하려 할 때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보일까? 그들의 언어는 어떻게 기능할까?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것은 상상해낸 허구적인 문화권에서 온 관찰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 세계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이것은 묘사된 것이 아닌 묘사하는 사람이 허구적이 되는 허구적 민족학의 시도다. 정항균의 다와다 요코: 몸과 사잇공간의 시학은 다와다 요코 문학을 하나의 테마로 환원하기보다, 그녀가 언어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책의 중심에는 몸과 사잇공간이 있다. 여기서 사잇공간은 단순히 두 문화 사이의 중간지대가 아니라, 번역 불가능성과 번역 가능성이 동시에 발생하는 장소, 말과 침묵, 내부자와 외부자, ‘고유한 것’과 ‘이방적인 .. 2025.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