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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24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해외소설

by 팍초이 2025. 12. 22.

 

《대성당》 표지

잘 들어요. 나는 빵장수일 뿐이라오. 다른 뭐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소. 예전에, 그러니까 몇십 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을지 몰라요.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일들이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 어쨌든 내가 어땠건 이제는 더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거요. 지금은 그저 빵장수일 뿐이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일들의 변명이 될 순 없겠지요. 그러나 진심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카버의 작품 중에서도 유독 “열려” 있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그의 초기 단편들이 대개 단절과 궁핍의 공기를 단단히 잠가두는 방식이었다면, 이 작품은 끝내 어떤 틈을 남긴다. 그 틈은 거창한 구원이나 화해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감각이 아주 잠깐 다른 사람에게 접속되는 순간에서 생긴다. 그래서 영어권 리뷰들은 대성당을 카버가 더 ‘풍부하고 관대해진’ 시기로 넘어가며 보여준 대표작으로 자주 위치시킨다. 카버 본인도 뼈만 남기듯 줄이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면 막다른 길이라고 느꼈고, 더 넓은 뉘앙스와 범위를 원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단편의 힘은 서사의 골격이 아니라 화자의 결핍에서 출발한다. 이름 없는 남편 화자는 아내의 “오래된 친구”인 맹인 로버트의 방문을 앞두고, 불편함을 넘어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그는 로버트를 한 인간으로 상상하지 못한 채 ‘맹인’이라는 표지에 고정시키고, 아내와 로버트 사이의 친밀함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질투와 비아냥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이 설정은 독자로 하여금 처음부터 화자에게 호의를 주기 어렵게 만들지만, 바로 그 비호감이 이야기의 장치가 된다.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따뜻했던 사람의 교훈이 아니라, 끝끝내 어색하고 둔감했던 사람의 손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대성당이 탁월한 지점은 ‘본다’는 것의 의미를 끝까지 흔든다는 데 있다. 물리적으로는 로버트가 보지 못한다. 그러나 정작 정서적으로, 관계적으로, 그리고 세계를 해석하는 능력에서 더 ‘보지 못하는’ 사람은 화자다. 영어권 해설과 분석에서 자주 반복되는 말처럼, 이 이야기는 맹인 로버트의 시각 결핍보다 화자의 인식 결핍을 더 뼈아프게 드러낸다. 화자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속 성당을 보면서도 그것을 말로 옮기지 못하고,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앞에서도 “믿는 게 없다”는 공허함에 머문다.

 

결정적 장면은 결국 ‘설명’이 아니라 ‘그리기’로 온다. 화자가 말로 성당을 묘사하는 데 실패하자, 로버트는 함께 그려보자고 제안하고, 두 사람은 종이봉투 위에 펜으로 성당을 그린다. 로버트의 손이 화자의 손 위에 얹히고, 화자는 눈을 감은 채 선을 이어간다. 이 장면이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는 단순히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아주 구체적인 몸의 사건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쪽은 보지 못하고, 한쪽은 말하지 못하는데, 그 둘이 함께 손을 움직이는 순간 이해가 발생한다. 가디언의 공연 리뷰가 이 장면을 두고 “말을 잃은 자를 맹인이 이끈다”는 식의 은유적 핵심을 짚어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이 작품을 ‘따뜻한 성장담’으로만 읽으면, 카버가 남겨둔 불편한 잔향이 사라진다. 한 영문 학술 에세이는 이 변화가 지속 가능한 변화인지 끝까지 확언하지 않는 점을 강조한다. 화자가 느끼는 해방과 친밀감은 분명 강렬하지만, 카버의 세계는 계시가 곧 삶의 재구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특히 이야기 내내 아내는 “나의 아내”로만 불리며, 정서적으로 가장 섬세한 인물이면서도 결말의 중심 장면에서는 잠든 채 배제된다. 변화의 무대가 남성 둘의 손 위에서 만들어지는 동안, 여성의 위치는 통로이자 배경으로 밀려나고, 관계의 권력 구도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 ‘미완의 변형’이 오히려 대성당을 카버답게 만든다. 희망이 있되, 그 희망은 완성된 도착지가 아니라 잠깐 열린 문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대성당을 “기적”의 이야기라기보다 “감각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로 읽게 된다. 우리는 대개 이해를 머리의 일로 착각하지만, 이 단편에서 이해는 손의 움직임으로, 촉감으로, 함께 만든 선의 리듬으로 도착한다. 화자가 눈을 감는 순간 세계는 더 어두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처음으로 형태를 얻는다. 카버가 후기작에서 추구한 더 넓은 숨과 더 많은 뉘앙스는, 바로 이 장면처럼 말의 빈자리를 몸의 사건으로 채우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대성당》 내지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문학동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