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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4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정유정, 글쓰기 정유정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는 소설가 정유정이 자신의 창작 비밀을 체계적으로 풀어놓은 책이자, 이야기 쓰기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법서다. 그녀의 소설 《7년의 밤》을 재밌어서 후다닥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책은 흔한 요령 나열식 안내서가 아니라, 실제로 소설을 써온 작가의 몸과 감각에서 길어 올린 경험의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문장을 읽다 보면 ‘배운다’기보다 ‘이야기를 바라보는 눈’을 함께 훈련받는 느낌이 든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동사에 대한 집요한 태도다. 정유정은 수식어에 기대지 않고도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는 튼튼한 동사를 고르라고 말한다. ‘뛰다’ 대신 ‘내닫다’, ‘치닫다’, ‘쇄도하다’를 선택하면 ‘빨리’라는 부사가 필요 없어진다는 설명은 단순한 문장 기술을 넘어, .. 2025. 12. 29.
책 리뷰 33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 조르주 바타유, 철학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결정적 사건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구(혹은 노동)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혹은 놀이)의 탄생이다. 예전에 프랑스 남부를 여행한 적이 있다. 라스코 동굴이 발굴된 이후 주변 지역에서 하나둘씩 동굴벽화들이 발견되어 한 일대에 작고 큰 여러 동굴들이 밀집되어 있다. 20만년 전의 그림을, 어떤 흔적을 본다는 것 평생에 잊지 못할 감각, 기억이 되었다. 매일의 삶을 자각없이 살아내던 내게 그 경험은 인류란 무엇인지, 나는 인류의 역사에 어디에 서있는지 잠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교과서에서 보던 것과는 정말 달랐다. 시원하게 그려진 선들이나 동물의 형태들이 우리가 믿고 있는 현대인에 대한 찬양을 금방 부숴버린 느낌이었다. 인류는 왜 캄캄한 동굴에서, 식.. 2025. 12. 28.
책 리뷰 32 《AI 경제》, 로봇 시대의 일자리와 복지, 로저 부틀, 경제 로봇이라는 단어는 체코의 공상과학 작가 카렐 차페크 Karel Capek가 1920년에 발표한 희곡 에서 처음 나온 것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단어의 언어학적 뿌리는 의무적인 노동을 뜻하는 robota와 봉사를 뜻하는 robotrick에 있는 것 같다. 인공지능이라는 말 역시 처음부터 실험실의 낭만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과업으로 제시됐다. 존 매카시 등이 1955년에 다트머스 연구 프로젝트를 제안하면서 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용어를 내세웠고, 1956년 여름 워크숍이 그 분야의 출발점으로 기억된다. 언어 사용, 추상 개념, 문제 해결, 자기 개선 같은 목표들이 그때 이미 적혀 있었다는 점은 오늘의 열광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부틀은 여기.. 2025. 12. 26.
책 리뷰 31 《공간의 종류들》, 조르주 페렉, 에세이, 하이브리드에세이 이런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공간은 질문이 되고, 더는 명백한 것이 못 되며, 더는 통합되지 않고, 더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공간은 하나의 의심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곳을 기록해야 하고 가리켜야 한다. 공간은 결코 내 것이 아니며, 한 번도 내게 주어진 적이 없지만, 나는 그 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이 책의 장르 감각을 딱 한 단어로 고정하기는 어렵다. 프랑스에서도 이 작품은 단순한 에세이로만 분류되기보다는, 사유의 밀도와 문장의 리듬 때문에 철학적 에세이와 시적 산문(혹은 시) 사이에 놓인 하이브리드 형식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래서 읽는 내내 논리적으로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문장이 감각의 기록처럼 변하고, 설명의 문장과 이미지의 문장이 서로를 밀어내며 공존한다.. 2025. 12. 26.
책 리뷰 30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고종석의 언어학 강의》, 고종석, 언어학, 인문서 세계는 연속적이지만, 언어는 불연속적이다.고종석의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는 언어학 “강의”라는 형식을 빌리지만, 사실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를 흔드는 책이다. 세계는 연속적이지만 언어는 불연속적이다. 세계는 끊김 없이 이어져 있는데, 우리는 말로 그것을 자른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사물은 경계를 얻고, 경계를 얻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이것’과 ‘저것’으로 분단한다. 우리가 자연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믿음은, 사실 모국어가 지령하는 대로 세계를 나누는 습관에 더 가깝다. 언어는 현실의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분할하는 칼날이다. 그러니 언어를 바꾸면 세계의 윤곽도 바뀐다. 이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언어의 분할이 추상적인 분류학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말의 경계는 곧 인간을 분류하.. 2025. 12. 25.
책 리뷰 29 《애호가들》, 정영수, 한국소설, 단편소설 시간을 흘려보내면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온다는 말은 모순 같지만 사실이다. 원래 모든 미래는 과거를 품고 있는 법이니까. 정영수의 애호가들은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읽고 나면 이상하게도 “여덟 편을 읽었다”기보다 “하나의 사유를 여덟 번 다른 각도로 비춰본 것 같다”는 감각이 남는다. 각 편의 사건은 서로 다르고 인물도 다르지만, 반복해서 돌아오는 질문들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애호하는지, 애호한다는 말이 얼마나 쉽게 취향의 깃발이 되면서 동시에 얼마나 자주 생의 공포를 가리는 천이 되는지. 그리고 변해야 하는 것들은 결국 변한다는, 어쩐지 너무 단순해서 더 무서운 사실. 오로지 작품 그 자체만이 스스로 고유하게 존재한다는 생각, 그래서 어떤 언어로 되어 있든 각 문장이 가리키는 의미는 하나일.. 2025.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