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인간이 창조한 세계이자 특유의 의미들로 가득하고 도덕으로 넘쳐나는 세계(이 우주에서 우리만은 예외라고 느끼게 만드는 독특한 세계)에 관한 민족지적 기록 작성에 능통한 우리들?은 이처럼 낯설고 인간적이지 않은 창조물을 그러나 동시에 너무 인간적인 창조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숲은 생각한다》는 이상한 책이다. 숲이 생각한다는 명제를, 숲이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명제로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기이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숲이 생각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숲이 생각한다는 사실의 산물이라는 것. 사고가 인간의 특권이라는 오래된 습관이 잠깐 흔들리고, 흔들린 틈으로 숲이 들어온다.
나는 이 책을,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게 만드는 민족지로 읽었다. 그런데 그 민족지는 인간만을 다루거나 동물만을 다루지 않는다. 인간과 비인간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다룬다. 그 차이가 결정적이다. 인간적인 것을 이해하려고 인간의 속성에만 매달릴 때 우리는 순환적인 폐쇄성 안에서 맴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인간을 가져오는 방식. 그 회전문을 깨는 것은 오히려 비인간과의 관계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 대 자연’의 대립이 아니라, 서로를 읽고 서로를 해석하는 존재들의 얽힘이다.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유한한 존재들과 우리를 연결시킨다.
저자 에두아르도 콘은 에콰도르 상부 아마존(Upper Amazon) 지역에서 루나(Runa) 사람들과 함께 보낸 현장연구를 바탕으로 이 이야기를 직조한다. 숲에서의 사냥, 꿈, 추적, 우연처럼 보이는 징후들이 어떻게 의미가 되는지. 인간의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서도, 삶은 이미 ‘기호를 읽는’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생각’은 인간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활동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세계를 표상하고 예감하고 계산하는 관계적 작동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인간이 창조한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특유의 의미들로 가득하고 도덕으로 넘쳐나는 세계. 이 우주에서 우리만은 예외라고 느끼게 만드는 독특한 세계. 숲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 만든 이 창조물은 낯설고 인간적이지 않은데, 동시에 너무 인간적이다. 그 과잉의 도덕과 과잉의 의미는 사실 우리를 보호해주는 집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가두는 울타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자연을 낭만화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간적인 것’으로 과도하게 정의해왔는가에 가깝다.
인간만을 다루거나 동물만을 다루는 민족지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다루는 민족지는 인간 특유의 속성에만 의지하여 인간적인 것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갇히게 되는 순환적 폐쇄성을 부수어 연다.
내가 이 책에서 계속 붙잡히는 문장은,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유한한 존재들과 우리를 연결시킨다는 말이다. 인간만 죽는 게 아니라, 사냥감도 죽고, 숲도 변하고, 종도 사라진다. 유한성은 예외가 아니라 공통 조건이다. 그래서 윤리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취약한 존재들이 서로의 징후를 읽으며 살아남는 방식 속에도 있다. 숲을 ‘자원’으로 보는 시선이 단숨에 가벼워지는 이유는, 숲이 우리 바깥의 배경이 아니라 같은 조건(유한성) 위에서 함께 세계를 꾸리는 참여자처럼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인류학에서 큰 영향을 얻은 이유는 존재론을 문화로 바꾸지 않은 채 복수의 존재론을 제시한데에 있다. 상이한 세계관(worldviews)이 아니라 상이한 세계들(worlds)이 있다는 주장. 이 말은 단지 상대주의의 세련된 표현이 아니다. 세계가 하나이고 해석만 여럿이라는 전제를 뒤집는다. 숲에서의 삶은 ‘다른 문화의 관점’이 아니라, 다른 실재의 조직 방식일 수 있다. 그때 인류학의 목적은 메릴린 스트래선의 말처럼 새로운 사고의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된다. 이해란 번역의 완료가 아니라, 사고가 가능한 영역 자체를 넓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은 동시에,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을 경고한다. 관계성에 관한 특정한 사고방식으로 우리가 식민화되어 있다는 것. 우리는 인간 언어를 구조화하는 연합의 형식, 우리의 문법과 논리로만 비인간의 연합을 상상한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전제를 투사하고, 비인간에게 우리 자신의 특성을 부여하고, 심지어 비인간이 ‘교정된 인간의 거울상’을 가져다줄 것이라 기대하며 자아도취에 빠진다. 이 대목에서 《숲은 생각한다》는 단순한 포스트휴먼 선언이 아니라, 포스트휴먼 담론의 나쁜 습관까지도 함께 걷어내려 한다. 비인간을 불러오는 목적이 인간을 더 아름답게 확장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 인간의 사고를 인간 바깥으로 열어젖히기 위해서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기중심적으로 확장하는지부터 의심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을 ‘숲을 이해하는 책’이라기보다 ‘이해의 형식을 흔드는 책’으로 기억하게 된다. 숲이 생각한다는 문장은 자연 찬가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가 어디까지 뻗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다. 우리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사고 자체가 이미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확장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불안이다.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은 겸손함을 주지만, 동시에 우리가 믿어온 안정된 세계(의미와 도덕으로 꽉 찬 세계)가 사실은 아주 얇은 구조물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준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의 태도를 신뢰한다.
숲을 신비화하지 않으면서, 숲을 침묵하는 대상으로 두지도 않는다. 인간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오만한 문법을 그대로 용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의 조건을 새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느린지 끝까지 알고 있는 문장들이라는 점에서. 숲은 생각한다는 말이 정말로 의미를 갖는 순간은, 우리가 그 말을 통해 숲을 설명해버렸을 때가 아니라, 그 말 때문에 인간의 설명 방식이 잠깐 무너질 때다.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우리는 우리 자신의 특성을 비인간에게 부여하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교정된 거울상을 비인간이 가져다줄 것을 기대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

《숲은 생각한다》, 에두아르도 콘, 사월의책,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