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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4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정유정, 글쓰기

by 팍초이 2025. 12. 29.

정유정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는 소설가 정유정이 자신의 창작 비밀을 체계적으로 풀어놓은 책이자, 이야기 쓰기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법서다. 그녀의 소설 《7년의 밤》을 재밌어서 후다닥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책은 흔한 요령 나열식 안내서가 아니라, 실제로 소설을 써온 작가의 몸과 감각에서 길어 올린 경험의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문장을 읽다 보면 ‘배운다’기보다 ‘이야기를 바라보는 눈’을 함께 훈련받는 느낌이 든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동사에 대한 집요한 태도다. 정유정은 수식어에 기대지 않고도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는 튼튼한 동사를 고르라고 말한다. ‘뛰다’ 대신 ‘내닫다’, ‘치닫다’, ‘쇄도하다’를 선택하면 ‘빨리’라는 부사가 필요 없어진다는 설명은 단순한 문장 기술을 넘어, 언어가 가진 밀도를 일깨운다. 이 원칙은 문장을 간결하게 만드는 동시에 장면의 속도와 감정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게 한다. 말하자면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묘사에 대한 접근 또한 인상 깊다. 작가는 자신의 눈을 카메라 렌즈라고 상상하라고 조언한다. 머릿속에서 동영상을 찍듯 풍경을 바라보며, 줌인과 줌아웃을 통해 장면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노을이 지는 하늘에서 시작해 나무, 강아지, 낙엽, 그리고 주인공의 발밑까지 다가오는 묘사는 독자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혹은 주인공에서 바깥으로 확장되며 세계를 넓히는 방식 역시 이야기의 분위기와 긴장을 조절하는 도구가 된다. 이는 묘사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서사의 리듬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플롯에 대한 설명도 명확하다. 로널드 B. 토비아스의 정의를 빌려, 플롯을 ‘작품 속 사건들의 배열’이라고 설명하며, 그 배열의 기준은 언제나 이야기의 목적이라고 강조한다. 사건이 많다고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향해 유기적으로 배치될 때 비로소 서사가 된다는 점은 초보자뿐 아니라 경험 많은 창작자에게도 중요한 경고처럼 다가온다.

 

또한 초고는 시간 순서대로 쓰되, 이후 장면의 재배치를 통해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야 한다는 조언은 창작 과정의 현실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완벽한 첫 문장을 강박적으로 추구하기보다, 먼저 끝까지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완성하라는 메시지는 용기를 준다.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는 작법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창작자의 태도를 다잡아주는 책이다. 이야기란 기술 이전에 목적과 감각의 문제라는 사실, 그리고 그 감각은 훈련될 수 있다는 믿음을 차분하게 전달한다.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뿐 아니라, 좋은 이야기를 읽고 싶은 독자에게도 이 책은 충분히 의미 있는 안내서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점은 정유정 작가의 ‘드로잉’이다. 인터뷰나 강연을 통해 공개된 그녀의 작업 노트를 보면, 인물 관계도와 사건의 흐름을 도식화한 드로잉이 등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메모 수준이 아니라, 이야기의 짜임새를 위한 치밀한 설계도에 가깝다. 인물 간의 감정선, 갈등의 방향, 사건이 충돌하는 지점들이 선과 화살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한 편의 소설이 우연이나 영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에서 강조하는 플롯의 개념과 이 드로잉은 서로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플롯이란 목적을 향해 사건을 배열하는 일이라면, 드로잉은 그 배열을 시각적으로 검증하는 도구다. 어떤 사건이 앞에 와야 긴장이 살아나는지, 어느 지점에서 독자의 감정이 이탈할 위험이 있는지를 미리 점검하는 과정인 셈이다. 이는 초고를 시간 순서로 쓰고, 이후 장면을 재배치하며 흐름을 다듬는다는 책 속 조언을 실제 작업으로 구현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드로잉은 이야기 쓰기를 ‘감각의 영역’에만 두지 않고, ‘구조의 영역’으로 끌어온다. 감정과 상상력 위에 논리와 설계를 더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정유정의 소설은 몰입감이 강하면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며 본능적으로 끌려가지만, 그 이면에는 수없이 계산된 선택과 배치가 숨어 있다.

 

결국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는 문장과 묘사, 플롯과 퇴고뿐 아니라, 이야기를 다루는 작가의 태도까지 보여주는 책이다. 동사 하나를 고르는 집요함과, 드로잉으로 구조를 점검하는 성실함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감각에만 기대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설계의 과정임을 이 책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정유정, 은행나무,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