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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3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 조르주 바타유, 철학

by 팍초이 2025. 12. 28.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결정적 사건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구(혹은 노동)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혹은 놀이)의 탄생이다.

 

 

예전에 프랑스 남부를 여행한 적이 있다. 라스코 동굴이 발굴된 이후 주변 지역에서 하나둘씩 동굴벽화들이 발견되어 한 일대에 작고 큰 여러 동굴들이 밀집되어 있다. 20만년 전의 그림을, 어떤 흔적을 본다는 것 평생에 잊지 못할 감각, 기억이 되었다. 매일의 삶을 자각없이 살아내던 내게 그 경험은 인류란 무엇인지, 나는 인류의 역사에 어디에 서있는지 잠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교과서에서 보던 것과는 정말 달랐다. 시원하게 그려진 선들이나 동물의 형태들이 우리가 믿고 있는 현대인에 대한 찬양을 금방 부숴버린 느낌이었다. 인류는 왜 캄캄한 동굴에서, 식량을 비축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림을 그렸나. 

 

바타유가 라스코를 붙잡는 방식은, 동굴벽화가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왜 하필 그렸는가”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 있다.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다면 하나는 도구, 곧 노동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 곧 놀이의 탄생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술은 노동의 다음 단계가 아니라 노동의 반대편에 놓인다. 예술은 유용성과 반대되는 가치를 지닌 활동,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에 대한 항의다. 그 항의가 가능하려면 역설적으로 생존의 세계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예술은 생존이 완결된 뒤에야 가능한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질서가 막 성립하는 순간 그 질서의 바깥을 향해 튀어나오는 첫 번째 균열에 가깝다.

 

나는 이 책이 “예술의 기원”을 설명한다기보다, 인간이 인간이 되는 방식이 얼마나 역설적인지 보여준다고 느낀다. 바타유가 말하는 노동은 단순히 손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다. 노동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다. 노동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자리를 미래 속에 먼저 잡아두고, 그 목표를 향해 현재를 조직하는 행위다. 그 순간부터 인간의 머릿속에서 사물은 두 가지로 나뉜다. 지금 있는 것들과 미래에 있을 것들. 이 분할이 생기는 순간 인간은 동물과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동물의 삶이 대체로 현재의 흐름에 붙어 있다면, 인간은 미래의 대상이 현재를 지배하게 만드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바타유에게 노동은 유용성의 원칙이자, 미래가 현재를 압박하는 최초의 체계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바타유는 말한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놀이다. 그리고 이 놀이가 단순한 휴식이나 장식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바타유는 라스코의 의미를 규정한다는 말을, 노동의 세계에서 놀이의 세계로의 이행을 알아보겠다는 말로 바꿔 읽는다. 호모 파베르에서 호모 사피엔스로의 이행, 초안에서 완성품으로의 이행. 여기서 “완성품”은 더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 유용성을 넘어서는 어떤 과잉의 흔적이다. 라스코의 그림들은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직접 늘려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것은 남았다. 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인간이 유용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50만 년의 겨울 뒤에 찾아온 라스코 시대가 처음 맞은 봄날의 오후 같다”는 비유가 아름답고도 섬뜩하다. 이 봄은 기술의 봄이 아니라, 금지와 규율로 굳어지는 생존의 세계 위에 처음으로 펼쳐지는 축제의 오후다. 오후라는 말에는 이상한 뉘앙스가 있다. 하루가 이미 한 번 돌아갔다는 느낌, 빛이 가장 강렬하지만 동시에 곧 저물 것 같은 예감. 라스코의 동물들은 살아 있는 사냥감이면서 동시에, 이미 형상으로 건너간 존재다. 그 형상화는 생존을 돕기 위한 도식이라기보다, 생존을 넘어서는 무엇을 향한 몸짓이다. 인간이 불필요한 것을 만들기 시작한 순간, 인간은 단지 살아남는 종이 아니라 의미를 과잉 생산하는 종이 된다.

 

여기서 사냥을 노동이 아니라 동물적 활동의 연장으로 보는 관점도 흥미롭다. 사냥은 무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만 인간적이었고, 돌을 이용한 노동이 인간을 절대적으로 동물과 분리했다고 말할 때, 바타유는 인간성을 “지능”이나 “언어”로 낭만화하지 않는다. 인간성은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아 실용성을 계산하는 태도, 시간을 쪼개 미래를 확보하려는 태도에서 먼저 생겨난다. 그러므로 라스코의 예술은, 인간이 인간이 된 뒤에야 가능한 부차적 활동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 되는 방식에 균열을 내는 활동이다. 노동이 만들어낸 목적의 질서에, 목적 없음의 세계가 개입하는 순간. 그때 비로소 인간의 세계는 단단해지면서 동시에 불안정해진다.

 

바타유가 라스코와 함께 마네를 붙들어오는 것은 이 불안정함을 근대로 끌고 오기 위해서일 것이다. 마네는 “새로운 기법”의 발명가라기보다, 회화가 수행해오던 정당화의 규칙을 어긋나게 만든 인물로 자주 읽힌다.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 그림이 어떤 의미를 제공해야 하는가. 이 모든 ‘유용한 해석’의 요구 앞에서 마네의 회화는 어딘가 불친절하고, 너무 직접적이며, 너무 현재적이다. 바타유의 관점에서 본다면 마네는 근대의 노동적 세계, 즉 효율과 생산과 규율의 세계 한가운데서 다시 놀이의 원칙을 호출한다. 그 놀이는 유희라기보다 항의에 가깝다. 의미를 과잉으로 부여하는 사회 속에서, 오히려 의미를 단정하지 않는 이미지로 세계를 흔드는 방식.

 

결국 라스코와 마네 사이에 놓인 공통점은, 예술이 언제나 어떤 “질서”의 바깥을 열어젖히는 순간에 출현한다는 점이다. 라스코는 노동의 질서가 막 성립한 자리에서 놀이의 세계를 열고, 마네는 근대의 규범적 시각 체계 속에서 다시 그 균열을 낸다. 그래서 바타유의 예술론은 예술을 고상한 정신의 산물로 띄우기보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유용성의 감옥을 잠깐씩 무너뜨리는 탈주로 이해하게 만든다. 예술은 생존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생존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의 모순이 남긴 흔적이다.

 

노동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방식이고, 예술은 그 희생의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하는 방식이다. 모닥불이 아이디어의 용광로였던 것처럼, 라스코는 의미의 용광로다. 거기서 인간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는 것 이상을 위해 형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 형상들은 결국, 시간에 의해 마모되고 파괴될 우리의 공간들 속에서, 이상하게도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 유용한 것은 사라지고, 쓸모없어 보였던 것이 남는다는 역설. 바타유가 라스코를 통해 말하는 예술의 탄생은 아마 그 역설의 시작일 것이다.

 

예술은, 생존에 목적을 둔 세계에 대한 항의다.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 조르주 바타유, 워크룸프레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