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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0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고종석의 언어학 강의》, 고종석, 언어학, 인문서

by 팍초이 2025. 12. 25.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고종석의 언어학 강의》 표지

 

세계는 연속적이지만, 언어는 불연속적이다.


고종석의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는 언어학 “강의”라는 형식을 빌리지만, 사실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를 흔드는 책이다. 세계는 연속적이지만 언어는 불연속적이다. 세계는 끊김 없이 이어져 있는데, 우리는 말로 그것을 자른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사물은 경계를 얻고, 경계를 얻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이것’과 ‘저것’으로 분단한다. 우리가 자연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믿음은, 사실 모국어가 지령하는 대로 세계를 나누는 습관에 더 가깝다. 언어는 현실의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분할하는 칼날이다. 그러니 언어를 바꾸면 세계의 윤곽도 바뀐다.

 

이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언어의 분할이 추상적인 분류학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말의 경계는 곧 인간을 분류하는 경계가 되고, 그 경계는 정치와 윤리로 이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모국어가 지령하는 방식으로 타인을 분단한다. 여기서 고종석의 ‘불순’은 단지 문법적으로 섞인 언어나 외래어의 문제가 아니다. 불순은 세계의 섞임 자체, 그리고 그 섞임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관한 문제다.

 

그래서 헤테로글로시아가 등장한다. 한 언어공동체 안에 사회적·지역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쓰는 여러 변종들이 공존한다는 것. 바흐친이 이것을 소설의 본질로 보았다는 설명은 단순한 문학이론 소개가 아니다. 소설이 생기를 얻는 것은, 한 세계가 하나의 목소리로 단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말투와 계급의 억양, 지역의 리듬, 직업의 습관어가 충돌하고 섞이면서, 소설은 살아 있는 사회가 된다. 고종석의 문체가 자주 “언어학의 설명”을 “문학의 생기”로 연결하는 이유도, 언어를 단일한 규칙 체계로 보지 않고 삶의 진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결국 헤테로글로시아는 미학이면서 윤리다. 한 목소리로 세계를 통일하려는 욕망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번역자는 반역자다.

 

번역은 충실함의 기술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어긋나는 선택의 연쇄다. 어떤 단어를 고르는 순간 다른 뉘앙스는 버려진다. 원문과 완전히 겹치는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자는 반역하지 않으면 번역할 수 없다. 그런데 고종석은 이 반역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한다. 왜냐하면 언어가 애초에 불연속적이고 세계는 연속적이기 때문에, 번역의 ‘어긋남’은 결함이 아니라 언어의 본질이 드러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번역은 불순함의 가장 정직한 실천이다. 섞임을 인정하는 행위이자, 순수한 원본이라는 환상을 내려놓는 행위.

 

모든 언어와 문화가 감염되어 있고 우리 존재 자체가 감염되어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면, 속죄양 만들기나 호모 사케르 만들기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감염은 부정이 아니라 현실이다. 섞임은 타락이 아니라 조건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순수하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반드시 불순한 누군가를 찾아내어 도려내려 한다. 사회는 ‘순수’를 유지하기 위해 경계를 강화하고, 그 경계 밖으로 밀려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래서 고종석이 말하는 정말 위험한 것은 불순한 게 아니라 순수한 것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불순함을 인정하면 경계의 폭력이 약해지지만, 순수함을 신앙처럼 믿으면 경계는 곧 폭력이 된다.

 

우리는 모국어가 지령하는 대로 자연세계를 분단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언어학이 갑자기 아주 현실적인 학문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쓰는 단어 하나가 세상을 자르는 방식이고, 그 자르는 방식이 타인을 자르는 방식이며, 결국 정치와 윤리로 이어진다는 사실. 동시에 이 책은 묘하게 위로를 준다. 우리가 모두 불순하고 모두 감염되어 있다는 인정은 냉소가 아니라 관용의 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순수하지 않다”는 고백은 어떤 때에는 “그러니 너도 완전히 배제되지 않아도 된다”는 윤리로 이어진다.

 

서평으로 정리하면,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는 언어를 사랑하는 책이면서, 언어를 통해 순수주의의 폭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책이다. 언어의 불연속성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완벽한 의미 전달의 환상에서 내려오고, 번역의 반역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를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정제된 순수함이 아니라, 섞이고 어긋나고 충돌하면서도 계속 살아남는 말들의 생기다. 그리고 그 생기는, 우리가 더 너그러워질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모든 언어와 문화가 감염되어 있고 우리 존재 자체가 감염되어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면, 속죄양만들기나 호모 사케르만들기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스스로를 순수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어떤 불순한 것을 찾아서 뽑아내버릴 거예요. 속죄양을 찾을 거고, 호모 사케르를 찾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 모두가 불순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가 감염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에 대해 조금은 더 너그러워지지 않을가? 그래서 정말 위험한 것은 불순한 게 아니라 순수한 것이다!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고종석의 언어학 강의》 내지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고종석의 언어학 강의》, 고종석, 로고폴리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