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공간은 질문이 되고, 더는 명백한 것이 못 되며, 더는 통합되지 않고, 더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공간은 하나의 의심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곳을 기록해야 하고 가리켜야 한다. 공간은 결코 내 것이 아니며, 한 번도 내게 주어진 적이 없지만, 나는 그 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이 책의 장르 감각을 딱 한 단어로 고정하기는 어렵다. 프랑스에서도 이 작품은 단순한 에세이로만 분류되기보다는, 사유의 밀도와 문장의 리듬 때문에 철학적 에세이와 시적 산문(혹은 시) 사이에 놓인 하이브리드 형식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래서 읽는 내내 논리적으로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문장이 감각의 기록처럼 변하고, 설명의 문장과 이미지의 문장이 서로를 밀어내며 공존한다.
페렉의 《공간의 종류들》을 읽고 있으면, “공간”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낯설어진다. 이 문장이 이상하게도 건방지게 들리는 순간, 동시에 너무 정직하게 들린다. 공간을 “내 것”이라고 말하는 건 결국 기억과 언어가 만들어낸 착각이기 때문이다.
1969년의 계획이 특히 인상적이다. 파리에서 자신이 살았거나 특별한 기억들이 얽힌 장소 열두 곳을 고르고, 매달 두 곳씩 묘사하기로 한다. 하나는 장소 자체에 대한 가능한 한 ‘가장 중심적인’ 묘사. 다른 하나는 기억의 장소로서의 묘사, 즉 그곳에서 떠오르는 사람과 사건을 끌어올리는 묘사. 그리고 그 기록들을 봉투에 넣어 밀랍으로 봉인한다. 사진작가 친구가 찍은 사진도 “쳐다보지 않고” 봉투에 넣고, 지하철 티켓, 식당 영수증, 영화관 티켓 같은 증거물도 함께 넣는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건, 이것이 단순한 기록 강박이 아니라 기록의 실패를 미리 계산한 방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가 본 장소와, 나중의 내가 기억하는 장소 사이에는 반드시 균열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페렉은 ‘증거’를 봉인해둔다. 그런데 그 증거는 진실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장치가 될지도 모른다. 기록은 구원이라기보다 미래의 배신을 대비하는 보험 같다.
그가 “나는 도시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랑이면서 동시에 체질 고백이다. 습관과 리듬과 어휘가 도시 사람의 것이라는 말은, 공간이 단지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언어와 감각의 구조까지 바꾼다는 뜻이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철책, 그물처럼 난 거리들, 끝없이 이어지는 회색빛 건물 외관들. 이런 것들이 자신을 놀라게 하거나 충격을 줄 수도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묘한 양가성이 있다. 도시는 “내 집 같은 느낌”을 주는 동시에, 늘 내 감각을 공격하고 흔드는 존재다.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도시에 붙어 있다. 페렉이 도시를 사랑하는 방식은 낭만적 향수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상처받으면서도 그 상처가 나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방식에 가깝다.
그리고 책의 가장 잔인한 부분은 ‘고향’에 관한 문장이다. 나의 고향, 내 가족의 요람, 내가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집, 어린 시절의 다락방. 그런데 페렉은 말한다. 이런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기에 공간은 질문이 되고, 더는 명백한 것이 아니며, 더는 통합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다. 이 문장을 읽으면, 우리가 흔히 “고향”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지도 위의 지점이 아니라, 기억이 발명해낸 통합의 환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고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통합되고 길들여진 공간을. 하지만 그런 공간은 없고, 없기 때문에 공간은 의심이 된다. 페렉은 이 의심을 부정하지 않고 끝까지 끌고 간다. 의심은 불편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글쓰기의 자리를 만든다.
나의 공간들은 부서지기 쉽다. 시간은 그것들을 마모시킬 것이며 그것들을 파괴할 것이다. 어떤 것도 그전에 있던 것과 유사하지 않을 것이고, 내 기억들은 나를 배반할 것이며, 망각이 내 기억 속에 침투할 것이고, 나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가장자리가 다 해지고 색이 바랜 사진들을 쳐다볼 것이다.
이 디테일이 페렉답다. 그는 역사적 사건이나 기념비가 아니라, 문득 사라지는 사소한 문구를 통해 시간의 폭력을 보여준다. 거대한 것들은 기록될 확률이 높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은 아무도 책임지고 기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이 실제로 살아온 공간은 대개 이런 사소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사소함의 소멸은 곧 삶의 소멸처럼 느껴진다.
글쓰기: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무언가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기. 점점 깊어지는 공허로부터 몇몇 분명한 조각들을 끄집어내기. 어딘가에 하나의 홈, 하나의 흔적, 하나의 표시, 또는 몇 개의 기호들을 남기기. 페렉의 글쓰기는 기억을 “완벽하게 복원”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완벽한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채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다. 그래서 이 책은 공간을 정리해주는 책이 아니라 공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러나 그 불안 덕분에, 우리는 매일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이 사실은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사라짐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작고도 집요한지 다시 보게 된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나는 자꾸 티켓을 모으고 싶어진다. 사진을 찍고 싶어진다. 어떤 유리창의 문구를 적어두고 싶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모래를 손으로 움켜쥐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도 안다. 페렉은 그 허망함을 비웃지 않는다. 오히려 그 허망함 속에서만 가능한 성실함—조각을 끄집어내고, 홈을 남기고, 표시를 남기는 성실함—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서 《공간의 종류들》은 공간에 대한 책이기 이전에, 사라짐에 대한 책이고, 사라짐 앞에서 글쓰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최소치를 끝까지 긁어내는 책이다.
공간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듯 사라진다. 시간은 공간을 데려가 형태를 알 수 없는 조각들만 내게 남겨놓는다.
공간의 종류들, 조르주 페렉, 문학동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