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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2 《AI 경제》, 로봇 시대의 일자리와 복지, 로저 부틀, 경제

by 팍초이 2025. 12. 26.

《AI 경제》 표지

 

로봇이라는 단어는 체코의 공상과학 작가 카렐 차페크 Karel Capek가 1920년에 발표한 희곡 <로섬의 보편로봇 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처음 나온 것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단어의 언어학적 뿌리는 의무적인 노동을 뜻하는 robota와 봉사를 뜻하는 robotrick에 있는 것 같다.

 

 

인공지능이라는 말 역시 처음부터 실험실의 낭만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과업으로 제시됐다. 존 매카시 등이 1955년에 다트머스 연구 프로젝트를 제안하면서 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용어를 내세웠고, 1956년 여름 워크숍이 그 분야의 출발점으로 기억된다. 언어 사용, 추상 개념, 문제 해결, 자기 개선 같은 목표들이 그때 이미 적혀 있었다는 점은 오늘의 열광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부틀은 여기서 곧장 오래된 예언들의 계보를 꺼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동장치가 스스로 일을 한다면 주인에게 노예가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장면, 기술이 노동을 밀어낸다는 공포가 이미 고대의 문장 속에도 있었다는 사실.  20세기 후반에는 제러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자동화·정보화가 생산성을 끌어올리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성공에서 배제되는 미래를 그렸다. 다만 이 책은 1955년이 아니라 1995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AI 경제의 태도는 묘하게 냉정하다. 종말론을 반복하지 않는다. 대신 숫자와 제도, 역사적 유비를 통해 공포가 과장되는 지점을 짚는다. 당신이 적어둔 OECD의 결론처럼, 로봇과 자동화가 모든 일을 쓸어버릴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고도로 자동화될 위험이 높은 일자리 비중을 14퍼센트로 추정한 연구가 있었고, 동시에 더 많은 일자리가 완전 대체가 아니라 업무 내용의 큰 변화에 직면할 수 있다는 진단도 함께 따라붙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건, 바로 이 간극을 끝까지 붙잡는다는 점이다. 사라지는 일만 세지 않고, 바뀌는 일의 형태까지 함께 본다.

 

또 하나의 축은 모라벡의 통찰이다. 컴퓨터가 성인 수준의 바둑이나 추론 과제는 비교적 쉽게 흉내 내지만, 지각과 운동 같은 영역에서는 한 살짜리 수준도 어렵다는 이야기. 이른바 모라벡의 역설은 자동화가 부딪히는 벽이 지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인간이 너무 오래 몸으로 축적해온 능력의 층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폴라니의 말,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문장이 합쳐지면, 판단·상식·유연성 같은 과제가 왜 끝내 자동화의 난제로 남는지 설명이 된다.

 

부틀이 궁극적으로 하려는 건 기술찬양도, 기술공포도 아니다. 그는 AI를 산업혁명의 연장선에 놓고, 생산성·성장·물가·분배·권력의 재편을 경제학의 언어로 점검한다. 어떤 리뷰들은 이 책이 기술 알람주의에서 한 발 비켜서서 비교적 낙관적이고 합리적인 길을 제시한다고 말하고, 또 어떤 리뷰들은 그의 전제나 시야가 충분히 열려 있지 않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 엇갈림 자체가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AI 경제는 하나의 강렬한 예언이라기보다, 과장된 예언들 사이에서 정책과 제도의 선택지를 따져보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의 결론은 대체로 이렇게 남는다. 로봇과 AI가 일을 전부 빼앗는다는 단순한 도식은 현실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위험은 존재하지만, 그 위험은 전면적 실업이라는 한 문장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형태로 온다. 일의 내용이 바뀌고, 숙련이 재배치되고, 생산성의 이익이 어디에 쌓이는지가 핵심이 된다. 그리고 그때 필요한 것은 미래를 단정하는 예언이 아니라, 변화를 견딜 수 있게 하는 분배와 교육과 제도의 설계다. 부틀이 기본소득 같은 처방에 신중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소개도 있는데, 그 역시 결국 일의 유인과 복지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이 책은 로봇이라는 단어가 태어날 때부터 품고 있던 강제노동의 그림자를 현재의 AI 담론에 겹쳐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자동화의 한계와 인간 능력의 비가시성을 통해 종말론을 억제한다. 결국 AI 경제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건 한 가지다. 공포를 믿기 전에 구조를 보자. 기술이 바꾸는 것은 단지 일자리의 숫자가 아니라, 일의 의미와 분배의 경로와 사회가 자신을 유지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행동하는 많은 것이 명백한 일련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나타난다는 뜻이다. 자동화하기에 가장 어렵다고 판명된 과제들은 판단과 상식 그리고 유연성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발휘되는 과정은 정작 본인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AI 경제》 내지

 

 

《AI 경제》, 로저부틀, 세종연구원,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