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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31 《공간의 종류들》, 조르주 페렉, 에세이, 하이브리드에세이 이런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공간은 질문이 되고, 더는 명백한 것이 못 되며, 더는 통합되지 않고, 더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공간은 하나의 의심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곳을 기록해야 하고 가리켜야 한다. 공간은 결코 내 것이 아니며, 한 번도 내게 주어진 적이 없지만, 나는 그 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이 책의 장르 감각을 딱 한 단어로 고정하기는 어렵다. 프랑스에서도 이 작품은 단순한 에세이로만 분류되기보다는, 사유의 밀도와 문장의 리듬 때문에 철학적 에세이와 시적 산문(혹은 시) 사이에 놓인 하이브리드 형식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래서 읽는 내내 논리적으로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문장이 감각의 기록처럼 변하고, 설명의 문장과 이미지의 문장이 서로를 밀어내며 공존한다.. 2025. 12. 26.
책 리뷰 29 《애호가들》, 정영수, 한국소설, 단편소설 시간을 흘려보내면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온다는 말은 모순 같지만 사실이다. 원래 모든 미래는 과거를 품고 있는 법이니까. 정영수의 애호가들은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읽고 나면 이상하게도 “여덟 편을 읽었다”기보다 “하나의 사유를 여덟 번 다른 각도로 비춰본 것 같다”는 감각이 남는다. 각 편의 사건은 서로 다르고 인물도 다르지만, 반복해서 돌아오는 질문들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애호하는지, 애호한다는 말이 얼마나 쉽게 취향의 깃발이 되면서 동시에 얼마나 자주 생의 공포를 가리는 천이 되는지. 그리고 변해야 하는 것들은 결국 변한다는, 어쩐지 너무 단순해서 더 무서운 사실. 오로지 작품 그 자체만이 스스로 고유하게 존재한다는 생각, 그래서 어떤 언어로 되어 있든 각 문장이 가리키는 의미는 하나일.. 2025. 12. 25.
책 리뷰 22 《바벨》, 정용준, 한국소설 언어는 인간의 존재이자 고향이지만 말은 그것으로 튕겨 나온 날카로운 화살이고 집 떠난 탕자와도 같습니다 언젠가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빠 서재에 꽂혀있던 정용준의 소설 《바벨》을 찾았다. 오래전 나의 형제가 샀던 책이다. 자녀들이 독립하여 집을 떠나고 한해 한해 지나면서 물건들이 조금씩 정리되지만, 아빠 서재의 책꽂이는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채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우리가 아직 치우지 못한 흔적들로 엉켜있다. 이 책이 아직 여기 있었구나 - 하며 조금 읽다가 독일로 가져올 때 챙겨 왔다. 《바벨》은 언어와 존재, 인간의 인식에 대한 깊은 사유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말과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닌, 물리적 실체와도 같은 존재로 인식하며, 이를 통해 인간 내면의 모.. 2025. 12. 22.
책리뷰 19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밀러, 해외소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룰루 밀러는 소설가라기보다는, 논픽션 작가이자 과학 저널리스트에 가깝다.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의 과학 프로그램 Radiolab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과학적 사실을 인간의 감정과 신념, 실패의 이야기와 엮어 전달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보여왔다. 그녀의 글은 언제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인간이 왜 그 정답을 갈망하게 되었는지를 묻는 쪽에 가깝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밀러의 첫 책이자, 자신의 삶이 깊은 혼란에 빠졌던 시기에 쓰인 작품이다. 개인적 상실과 좌절 속에서 그녀는 질서와 완벽함을 맹렬히 믿었던 과학.. 2025. 12. 20.
책리뷰 18 《어떤 나무들》, 최승자, 에세이 나의 이상한 버릇 중의 하나: 이렇게 해야 되나 저렇게 해야 되나 결정해야만 할 때 얼마간 궁리를 해보다가 그래도 마음을 정하지 못할 땐 결정을 잠에 맡긴다.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하고 하룻밤 자고 나면 아침에 눈을 뜨면서 결정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최승자 시인의 두 번째 산문집 《어떤 나무들》을 한국에서 독일로 오는 비행기에서 읽었다. 나에게는 익숙한 곳에서 더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니, 첫 독일행 비행기를 타던 게 선명이 기억났다. 예전에 최승자 시인이 엄마의 죽음에 대해 서술한 대목을 읽고 펑펑 울었던 기억도 난다. 담담하고 건조하지만, 어린아이처럼 관찰하는 그녀의 문장들을 참 좋아했다. 세상의 다양한 일들도, 그녀 같은 눈으로 바라본다면 뭐든 견딜 수 있을 만하지.. 2025. 12. 19.
책리뷰 17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에세이 인간은 즐거움을 먼저 발견했을까, 아니면 괴로움을 먼저 발견했을까? 책 목차가 나오기 전에 시인의 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최근의 한 10여년신비주의적 꿈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많은 독자들에게도 단순한 산문집이 아니라, 한 사람이 세계를 통과해온 방식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이 책이 초판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증보되어 나왔다는 사실은, 글과 글 사이에 흐르는 시간의 두께를 더 또렷하게 만든다. 초기의 문장과 후기에 쓰인 문장 사이에는 단절보다는 지속이 있고, 그 지속 속에서 시인의 사유는 더 느려지고 더 깊어진다. 병풍 하나로 죽음을 온전히 가리고 그 앞에서 이야기하고 술 마시고 고스톱을 치는 그러한 풍경들이 하나도 불경스러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우리 삶에 편안하게 만들어진, 지혜로운 죽음.. 2025.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