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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17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에세이

by 팍초이 2025. 12. 19.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표지

인간은 즐거움을 먼저 발견했을까, 아니면 괴로움을 먼저 발견했을까?

 

책 목차가 나오기 전에 시인의 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최근의 한 10여년

신비주의적 꿈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많은 독자들에게도 단순한 산문집이 아니라, 한 사람이 세계를 통과해온 방식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이 책이 초판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증보되어 나왔다는 사실은, 글과 글 사이에 흐르는 시간의 두께를 더 또렷하게 만든다. 초기의 문장과 후기에 쓰인 문장 사이에는 단절보다는 지속이 있고, 그 지속 속에서 시인의 사유는 더 느려지고 더 깊어진다.

 

병풍 하나로 죽음을 온전히 가리고 그 앞에서 이야기하고 술 마시고 고스톱을 치는 그러한 풍경들이 하나도 불경스러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우리 삶에 편안하게 만들어진, 지혜로운 죽음의 예식인 듯한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항시 삶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 편안한 것인가. 아니 어쩌면 죽음까지도 삶의 일부이며, 삶의 자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문장들은 감정을 과시하지 않는다.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앞세워 독자의 연민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읽는 동안 이상하게도 감정이 격해지기보다는 차분해진다. 죽음을 다루는 대목에서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놓인 사건이 아니라, 이미 삶 안에 스며들어 있는 어떤 풍경처럼 등장한다. 병풍 하나로 죽음을 가려두고 사람들이 여전히 이야기하고 웃는 장면을 지혜로운 예식으로 받아들이는 시선은, 죽음을 견디는 법이 아니라 삶을 지속하는 법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나’에 대한 성찰 역시 많은 독자들이 오래 붙들고 간 지점이지만, 나에게도 이 부분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나라는 존재를 세운다는 일이 곧 나 아닌 것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공격과 희생, 혹은 사랑과 증오가 생겨난다는 인식은 불편하면서도 정확하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종종 내가 선하다고 믿어온 감정들까지도 다시 의심하게 된다. 사랑이라고 불러왔던 것들, 이해라고 생각했던 태도들이 실은 얼마나 많은 폭력을 품고 있었는지를 이 산문은 조용히 드러낸다.

그녀의 두 눈은 그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기보다는, 그러니까 눈길을 곧바로 그 대상에 집중시킨다기보다는, 자신의 눈빛을 올올이 풀어 그 대상의 주위에 흩뜨려놓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덮고 나면, 무언가 정리되었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이런 저런 생각들이 풀어져 남는다. 이 책의 ‘게으름’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쉽게 판단하지 않겠다는 선택처럼 보인다. 서두르지 않고, 결론을 미루고, 세계와 자신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나는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인상이 바로 그 점이라고 느꼈다. 위로받았다기보다는, 조금 더 정직해질 수밖에 없게 되는 책. 그래서 다시 펼치게 되는 책.

 

나라는 아이덴티티 자체가 나 아닌 타자, 나 아닌 세계를 상정하게 되니까. 나를 세움으로써 나 아닌 것을 세우고, 그럼으로써 거기엔 공격, 희생 아니면 공격이나 희생의 위장된 형태인 거짓 사랑(우리가 흔히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이나 증오라는 작용이 생겨나니까.

 

 

그녀가 정신분열증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이 문장들이 비로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병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문장 속에 자리하고 있던 세계와의 불화에 뒤늦게 붙은 이름에 가깝다. 초점을 맺지 않고 대상의 주위를 맴도는 시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단정하지 않는 태도, ‘나’라는 정체성 자체를 의심하는 사유는 세계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매일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로 하나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그녀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구체적인 사건 너머에서 인류 모두에게 닿아 있는 보편성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최승자 시인의 《어떤 나무들은》도 읽은 적이 있는데, 쓴 시기를 보니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이후인 1994년이었다. 미국 아이오와 시티에서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산문집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느낀 신선함과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열정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다음 리뷰에서 더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난다,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