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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15

책리뷰 16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산문집 왜냐하면 이 아름다운 지상을 구성하는 모든 피조물과 사물들을 그냥 휙 지나쳐버리고, 미치광이 마냥 질주하면서 비참한 절망에서 달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앞으로만 내달리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심리를, 나는 절대 납득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영 납득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고요를, 고요한 것을 사랑한다. 나는 검약과 절제를 사랑하고 모든 종류의 소란과 성급함을, 정말이지 마음속 깊숙이 혐오한다. 진실을 말했으면 더 이상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스위스의 국민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작품이라기보다 걷는다는 행위가 한 인간의 사고와 감정, 그리고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느슨하게 풀어놓는지 보여주는 산문적 소설이다. 독일어 원제 Der Spaziergang으로 191.. 2025. 12. 18.
책리뷰 15 《Turning: A Swimming Memoir》 Jessica J. Lee, 외국에세이 제시카 J. 리의 Turning: A Swimming Memoir는 베를린의 호수들을 수영하며 쓴, 자연 에세이이자 회고록이다. 영어권에서는 이 책을 상실과 정체성, 자연을 함께 사유하는 ‘물속의 치유기’로 읽는 리뷰가 많다. 52주 동안 52개의 독일 호수를 찾아가 수영하겠다는 계획은 단순한 도전이라기보다, 마음이 무너진 시기에 스스로를 다시 붙들기 위한 구조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잡았던 계기는 아주 사적인 기억에서 시작한다. 그 여름, 친구에게 빌린 Turning을 읽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책장을 넘길수록 ‘호수로 캠핑을 가고 싶다’는 욕망이 점점 현실감 있게 자라났다. 책이 요구하는 건 여행 계획표가 아니라 몸의 감각이다. 베를린과 근교의 물로 직접 들어가 보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강.. 2025. 12. 18.
책리뷰 14 《내일의 연인들》 정영수, 한국소설 매해 여름이란, 이런 아름다운 계절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이 지속될 여름이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아득하고 눈부신 말이었다. 정영수의 내일의 연인들은 사랑을 찬미하거나 연애의 서사를 극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 사랑이라는 말과 사랑이 지나간 뒤에 남는 시간의 감각을 집요하게 더듬는 소설이다. 사랑은 본래 의미를 품은 신성한 무엇이 아니라, 때로는 그저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물질감 있는 단어처럼 느껴진다. “질량이 있고 푹신거리는 단어”라는 표현은, 사랑이 언제든 낭만의 의미를 잃고 언어로만 남을 수 있다는 냉정함을 품는다. 동시에 그 문장은 역설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가 오히려 피부에 닿는 촉감처럼 남아 사람을 붙잡는다는 사실까지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사.. 2025. 12. 18.
책리뷰 13 《올리버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누가 뭐래도 삶은 선물이라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수많은 순간이 그저 찰나가 아니라 선물임을 아는 것이라고. 게다가 사람들이 연중 이맘때를 이렇게 열심히 기념하는 것은 또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사람들의 삶이 어떻든(그들이 지금 지나치는 이 집들 가운데에는 근심스러운 고민도 있으리란 걸 제인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삶이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축하할 일임을 알기에 그들은 이맘때를 축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제가 리뷰할 책은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버 키터리지》입니다. 저는 사실 반복해서 읽지는 못하는 타입의 사람인데요. 이 책은 무려 3번이나 읽었습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분량과 문체라서 음악 듣듯이 읽었어요. 아, 이런 날은 이런 음악 듣고 싶다.. 2025. 12. 17.
책리뷰 12 《명예》 다니엘 켈만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말하는 걸 즐기지만, 많은 걸 경험한 사람은 느닷없이 할 말이 없어지는 법이라고 몇 년 전에 어느 노의사가 말했다. 지난 포스팅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에 이어 오늘은 《명예》 책 리뷰입니다. 《세계를 재다》가 2005년에 쓰이고 《명예》는 4년 후, 2009년에 쓰였습니다. 2017년에 쓰인《틸》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이 책도 곧 읽어보고 싶네요. 다니엘 켈만의 《명예》는 하나의 주인공을 따라가는 전통적 장편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느슨하게 연결되며 점점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는 연작소설에 가깝다. 9개의 다른 이야기가 묘하게 얽히 설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제목 그대로 핵심은 명예다. 더 정확히는 명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대 사회에.. 2025. 12. 17.
책리뷰 11 《세계를 재다》 다니엘 켈만 다니엘 켈만(Daniel Kehlmann)은 독일어권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동시대 소설가 중 한 명으로, 역사적 인물과 지적 담론을 대중적인 서사 감각으로 엮어내는 데 강점이 있는 작가다. 그의 대표작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이 바로 《세계를 재다》와 《명예》다. 독일 팟캐스트 중에 《Alles Gesagt?》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다니엘 켈만이 출연한 적 있다.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팟캐스트를 켰는데, 다니엘 켈만 에피소드여서 반갑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Alles Gesagt?》는 독일 주간지 Die Zeit 에서 만드는 장시간 인터뷰 팟캐스트다. 크리스토프 아멘트와 요한 베그너 두 사람이 진행하며, 매회 한 명의 게스트를 초대해 삶, 일, 취향, 생각을 깊게 파고든다. 이 팟캐스트의 가장 큰.. 2025.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