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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6

책 리뷰 31 《공간의 종류들》, 조르주 페렉, 에세이, 하이브리드에세이 이런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공간은 질문이 되고, 더는 명백한 것이 못 되며, 더는 통합되지 않고, 더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공간은 하나의 의심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곳을 기록해야 하고 가리켜야 한다. 공간은 결코 내 것이 아니며, 한 번도 내게 주어진 적이 없지만, 나는 그 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이 책의 장르 감각을 딱 한 단어로 고정하기는 어렵다. 프랑스에서도 이 작품은 단순한 에세이로만 분류되기보다는, 사유의 밀도와 문장의 리듬 때문에 철학적 에세이와 시적 산문(혹은 시) 사이에 놓인 하이브리드 형식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래서 읽는 내내 논리적으로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문장이 감각의 기록처럼 변하고, 설명의 문장과 이미지의 문장이 서로를 밀어내며 공존한다.. 2025. 12. 26.
책 리뷰 25 《토성의 고리》, W.G.제발트, 해외소설, 장편소설 토성의 고리는 적도 둘레를 원형궤도에 따라 공전하는 얼음결정과, 짐작하건대 유성체의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과거에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 이미지가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를 읽는 내내 붙잡고 놓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이 책이 결국 세계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보이는 형태에는 이미 파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 역시 멋지게 비상하는 곡선이 아니라 어느 자오선에 도달한 뒤 암흑으로 하강하는 궤도에 더 가깝다. 실제로 내가 침대에 누워 볼 수 있던 세상이라고는 창틀 안에 갇힌 무채색의 하늘조각이 전부였다. 제발트는 영국 동부 서퍽(Suffolk.. 2025. 12. 23.
책리뷰 19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밀러, 해외소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룰루 밀러는 소설가라기보다는, 논픽션 작가이자 과학 저널리스트에 가깝다.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의 과학 프로그램 Radiolab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과학적 사실을 인간의 감정과 신념, 실패의 이야기와 엮어 전달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보여왔다. 그녀의 글은 언제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인간이 왜 그 정답을 갈망하게 되었는지를 묻는 쪽에 가깝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밀러의 첫 책이자, 자신의 삶이 깊은 혼란에 빠졌던 시기에 쓰인 작품이다. 개인적 상실과 좌절 속에서 그녀는 질서와 완벽함을 맹렬히 믿었던 과학.. 2025. 12. 20.
책리뷰 18 《어떤 나무들》, 최승자, 에세이 나의 이상한 버릇 중의 하나: 이렇게 해야 되나 저렇게 해야 되나 결정해야만 할 때 얼마간 궁리를 해보다가 그래도 마음을 정하지 못할 땐 결정을 잠에 맡긴다.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하고 하룻밤 자고 나면 아침에 눈을 뜨면서 결정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최승자 시인의 두 번째 산문집 《어떤 나무들》을 한국에서 독일로 오는 비행기에서 읽었다. 나에게는 익숙한 곳에서 더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니, 첫 독일행 비행기를 타던 게 선명이 기억났다. 예전에 최승자 시인이 엄마의 죽음에 대해 서술한 대목을 읽고 펑펑 울었던 기억도 난다. 담담하고 건조하지만, 어린아이처럼 관찰하는 그녀의 문장들을 참 좋아했다. 세상의 다양한 일들도, 그녀 같은 눈으로 바라본다면 뭐든 견딜 수 있을 만하지.. 2025. 12. 19.
책리뷰 17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에세이 인간은 즐거움을 먼저 발견했을까, 아니면 괴로움을 먼저 발견했을까? 책 목차가 나오기 전에 시인의 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최근의 한 10여년신비주의적 꿈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많은 독자들에게도 단순한 산문집이 아니라, 한 사람이 세계를 통과해온 방식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이 책이 초판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증보되어 나왔다는 사실은, 글과 글 사이에 흐르는 시간의 두께를 더 또렷하게 만든다. 초기의 문장과 후기에 쓰인 문장 사이에는 단절보다는 지속이 있고, 그 지속 속에서 시인의 사유는 더 느려지고 더 깊어진다. 병풍 하나로 죽음을 온전히 가리고 그 앞에서 이야기하고 술 마시고 고스톱을 치는 그러한 풍경들이 하나도 불경스러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우리 삶에 편안하게 만들어진, 지혜로운 죽음.. 2025. 12. 19.
책리뷰 16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산문집 왜냐하면 이 아름다운 지상을 구성하는 모든 피조물과 사물들을 그냥 휙 지나쳐버리고, 미치광이 마냥 질주하면서 비참한 절망에서 달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앞으로만 내달리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심리를, 나는 절대 납득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영 납득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고요를, 고요한 것을 사랑한다. 나는 검약과 절제를 사랑하고 모든 종류의 소란과 성급함을, 정말이지 마음속 깊숙이 혐오한다. 진실을 말했으면 더 이상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스위스의 국민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작품이라기보다 걷는다는 행위가 한 인간의 사고와 감정, 그리고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느슨하게 풀어놓는지 보여주는 산문적 소설이다. 독일어 원제 Der Spaziergang으로 191.. 2025. 1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