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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16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산문집

by 팍초이 2025. 12. 18.

《산책자》표지

왜냐하면 이 아름다운 지상을 구성하는 모든 피조물과 사물들을 그냥 휙 지나쳐버리고, 미치광이 마냥 질주하면서 비참한 절망에서 달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앞으로만 내달리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심리를, 나는 절대 납득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영 납득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고요를, 고요한 것을 사랑한다. 나는 검약과 절제를 사랑하고 모든 종류의 소란과 성급함을, 정말이지 마음속 깊숙이 혐오한다. 진실을 말했으면 더 이상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스위스의 국민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작품이라기보다 걷는다는 행위가 한 인간의 사고와 감정, 그리고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느슨하게 풀어놓는지 보여주는 산문적 소설이다. 독일어 원제 Der Spaziergang으로 1917년에 출간되었고 이후 1920년에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 작품이 지금까지도 반복해서 읽히는 이유는 사건의 크기보다 시선의 방식 때문이다. 바깥으로 나가 걷는 순간, 화자는 글쓰기의 방과 일상의 의무에서 잠시 벗어나 세계를 다시 보게 된다.

 

아름다운 지상을 구성하는 피조물과 사물들을 휙 지나쳐버리며 미치광이처럼 질주하는 심리를 납득할 수 없다는 말, 고요를 사랑하고 검약과 절제를 사랑하며 소란과 성급함을 혐오한다는 말. 산책은 바로 이 반대편에서 시작된다. 속도와 효율을 숭배하는 세계에서, 걷기는 느림을 선택하는 행위이고 동시에 관찰을 선택하는 윤리다. 발저의 화자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걷지 않는다. 오히려 성취 강박을 잠시 내려놓기 위해 걷는다. 그래서 걷기는 도피가 아니라 태도다. 세계를 통과하는 방식, 나 자신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고집이다. 

 

산책의 구조는 간단하면서도 이상하게 복잡하다. 글상 앞의 고립에서 벗어나 산책을 결심한 화자가 길을 나서고, 그 길 위에서 크고 작은 만남과 장면들이 이어진다. 세금 징수원, 서점, 관청 같은 제도적 얼굴들이 불쑥 나타나고, 그 사이에 풍경과 공상, 과장과 농담이 끼어든다. 그래서 읽는 느낌은 도시와 교외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느슨한 편력인 동시에,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대한 우스꽝스럽고 날카로운 풍자처럼도 다가온다.

 

산책자는 사물을 오직 바라보고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비탄, 자신의 욕구와 결핍, 자신의 모든 궁핍을, 산책자는 마치 용감하고 투철하고 헌신적이며 모든 자질이 입증된 군인이 전쟁에서 그러듯이, 전부 무시하고 개의치 않고 잊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산책자는 사물을 바라보고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잊을 줄 알아야 한다는 문장은 이 작품의 핵심 기술을 정확히 짚는다. 발저의 산책은 자기표현의 축제가 아니라 자기소거의 훈련에 가깝다. 자신의 비탄, 욕구, 결핍, 궁핍을 잠시 무시하고 잊어버리는 능력. 여기서 잊는다는 것은 무감각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중심에 두는 습관에서 잠깐 내려오는 일이다. 산책자는 세계를 소유하지 않고, 세계 앞에서 작아지는 법을 연습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문장은 자주 사소한 것들을 과하게 찬미하거나 우스꽝스러울 만큼 공손해지는데, 그 과장 자체가 자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진다. 

 

 발저의 화자는 명랑하고 재치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명랑함이 언제나 생의 외로움과 맞닿아 있다. 산책이 즐거운 것은 혼자여서가 아니라, 혼자임을 잠시 덜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화자는 사람들과 스치고 말을 섞지만, 그 만남들은 깊어지기보다 흩어진다. 이 흩어짐이야말로 산책의 리듬이다. 연결과 단절이 교차하는 리듬 속에서, 화자는 자신을 견디는 방식을 연습한다.

 

발저의 관찰은 설명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결론 대신 잔향이 남는다. 이것은 무능이나 회피가 아니라, 세계를 다 안다고 말하지 않으려는 태도, 말로 포획하지 않으려는 절제에 가깝다. 그래서 산책은 지식의 과시가 아니라 감각의 기록이고, 서사의 완결이 아니라 시선의 이동이다. 길 위에서 본 것이 많을수록 오히려 말이 줄어드는 역설, 그 침묵의 품위가 이 작품을 오래 살아남게 한다.

 

산책은 걷기의 낭만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걷기의 자세를 말하는 책이다. 빨리 지나치지 않기, 쓸모로 재단하지 않기, 나를 중심에 두지 않기. 당신이 발췌한 문장들은 그 자세를 가장 밀도 있게 보여주는 핵심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걷고 싶어진다기보다, 같은 길을 다른 속도로 지나가 보고 싶어진다. 무엇보다도, 앞으로만 내달리는 삶이 아니라 고요를 사랑하는 삶이 아직 가능하다는 감각을 조용히 되찾게 된다. 지금 산책하러 나가봐야겠다.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으나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산책자》 내지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한겨례출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