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3 책 리뷰 28 《밝은 밤》, 최은영, 한국소설, 장편소설 그는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얼어붙은 강물이라는 말을 즐겨 했다. 시간은 환상일 뿐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다가 눈물이 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근래 눈물을 흘린 적이 있던가. 눈물을 자주 흘리지 않는 내게, 특히나 더 건조해져버린 요즘같은 날씨에 이 책은 다시 예전의 나로 잠시 돌아가게 만들어줬다. 최은영의 밝은 밤은 ‘한 사람의 삶’이라기보다 ‘여러 세대의 삶이 어떻게 다음 사람에게 건너가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야기의 힘은 사건의 급격한 반전에서 오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오래 지속되는 것들—가난, 돌봄, 상실, 생존,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우정과 연대—이 인물들의 시간을 촘촘히 엮어낸다. 이 책은 지연이 희령으로 내려가 할머니와.. 2025. 12. 24. 책 리뷰 25 《토성의 고리》, W.G.제발트, 해외소설, 장편소설 토성의 고리는 적도 둘레를 원형궤도에 따라 공전하는 얼음결정과, 짐작하건대 유성체의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과거에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 이미지가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를 읽는 내내 붙잡고 놓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이 책이 결국 세계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보이는 형태에는 이미 파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 역시 멋지게 비상하는 곡선이 아니라 어느 자오선에 도달한 뒤 암흑으로 하강하는 궤도에 더 가깝다. 실제로 내가 침대에 누워 볼 수 있던 세상이라고는 창틀 안에 갇힌 무채색의 하늘조각이 전부였다. 제발트는 영국 동부 서퍽(Suffolk.. 2025. 12. 23. 책 리뷰 22 《바벨》, 정용준, 한국소설 언어는 인간의 존재이자 고향이지만 말은 그것으로 튕겨 나온 날카로운 화살이고 집 떠난 탕자와도 같습니다 언젠가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빠 서재에 꽂혀있던 정용준의 소설 《바벨》을 찾았다. 오래전 나의 형제가 샀던 책이다. 자녀들이 독립하여 집을 떠나고 한해 한해 지나면서 물건들이 조금씩 정리되지만, 아빠 서재의 책꽂이는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채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우리가 아직 치우지 못한 흔적들로 엉켜있다. 이 책이 아직 여기 있었구나 - 하며 조금 읽다가 독일로 가져올 때 챙겨 왔다. 《바벨》은 언어와 존재, 인간의 인식에 대한 깊은 사유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말과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닌, 물리적 실체와도 같은 존재로 인식하며, 이를 통해 인간 내면의 모.. 2025. 12. 22.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