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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20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제임스 볼드윈, 해외 에세이, 흑인철학

by 팍초이 2025. 12. 20.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표지

 

너를 파괴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네가 진짜로 백인들의 세상에서 <검둥이>라고 부르는 존재라는 믿음이다.

 

 

1963년에 쓰인 제임스 볼드윈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의 원제는 The Fire Next Time이다.

 

제임스 볼드윈은 20세기 미국 문학과 민권 운동의 중요한 목소리 중 하나로 평가받는 작가다. 그는 소설, 에세이, 희곡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흑인의 삶과 미국 사회의 구조적 인종차별을 누구보다 날카롭고 정직하게 드러냈다. 1963년에 발표된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는 볼드윈이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직면하며 쓴 대표적인 에세이로, 당대 인종 문제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책 중 하나로 손꼽힌다. 볼드윈은 이 책에서 흑인이기에 다른 이유 없이 억압받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자유는 감당하기 어렵다. 내가 정치적 자유를 영적인 의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어떤 나라에서든 정치 제도는 그 나라의 영적 상태에 의해 위협받고 궁극적으로는 통제된다.

 

 

볼드윈은 또한 자유와 영적 상태의 관계를 깊이 성찰한다. 그는 자유를 단지 정치적 제도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문장에서 볼드윈은 정치적 제도는 영적·정서적 상태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고 말한다. 제도적 자유는 단지 법과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회가 그 구성원들의 정신과 감수성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깊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서도 그의 통찰은 계속된다.

 

검은 목숨에 대한 약탈은 이 나라의 유년기부터 반복적으로 주입돼 왔고, 역사를 거치며 강화되어 결국은 그들의 가보가 되고 지성이 되고 감수성이 되었다.

 

 

이 부분은 차별이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나 외부의 폭력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문화적·정신적 유산으로 체화된 구조적 폭력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인종차별은 미국 사회의 ‘역사적 자산’처럼 굳어져 왔으며, 그 영향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감수성과 인식에 깊게 스며 있다.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는 미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인종차별을 개인적 차원, 사회적 장치, 역사적 맥락에서 동시에 파헤친다. 볼드윈은 단지 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개인의 내면과 인간관계, 자유와 사랑의 조건까지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그의 글은 날카롭고 때로는 아프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인종과 자유, 인간 존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하는 고전으로 남아 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흑인 철학자 아킬레 음벰베(Achille Mbembe)와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이 떠오른다. 서양 철학자들만 빼곡히 있던 학교 세미나 중 처음으로 흑인 철학자들을 다루는 세미나가 생겼었고, 한 학기 내내 아킬레 음벰베의 책 《Kritik der schwarzen Vernunft》을 챕터별로 읽었다. 그 때 처음으로 흑인 철학자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알게 모르게 화이트워시가 된 내게는 그들의 접근법, 말투와 태도 모든 게 충격적으로 신선했다. 아, 어쩌면 나도 결국 세뇌된 게 아닐까- 스스로 의문을 던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모든 교육, 예술, 문화 세계를 믿지 못하겠다며 방황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아킬레 음벰베의 핵심 개념인 네크로폴리틱스Necropolitics 는 오늘날 권력은 더 이상 누가 시민인가를 결정하는데 그치지를 않고, 누가 살아도 되고 누가 죽어도 되는지를 결정하는가에 대해서 말한다.  그에게 현대 세계는 식민주의가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생명 위계의 관리 시스템이다. 흑인, 난민, 빈민, 식민지의 후손들은 여전히 죽어도 되는 존재로 배치된다. 이는 식민 구조가 형태를 바꿔 지속되고 있다고 말하는 파농의 의견과도 일치한다. 파농은 흑인이란 존재는 식민주의에 의해 정신적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썼다. 

 

다음에는 오랜 시간을 들여 독일어로 완독한 아킬레 음벰베의 책 《Kritik der schwarzen Vernunft》를 리뷰하겠습니다. 언젠가 한국어로 번역된다면 꼭 번역문으로도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수업에서 학생들과 함께 번역해가며 읽었는데, 여전히 그 의미가 맞는지 알쏭달쏭한 부분이 많습니다.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내지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제임스 볼드윈, 열린책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