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정유정 소설가의 인터뷰에서다. 그녀의 소설 《밝은 밤》을 하루 만에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부터 늘 소설가라는 존재가 궁금했다. 소설이란 결국 흰 종이 위에 글자를 채워 넣으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닌가. 캐릭터의 이름, 입는 옷, 말투와 습관, 그의 역사, 그의 환경, 그의 과거까지 모든 것을 설계하고 조율해야 하는 사람. 그런 일을 매일같이 하는 소설가의 삶과 작업 방식은 어떤 모습인지 늘 궁금했다. 그래서 소설가의 삶과 그들의 작업방식을 미약하게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인터뷰 형식의 글도 좋아한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정유정 소설가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그녀가 글쓰기에 참고하는 책 몇권을 추천했다. 그 목록 중 하나가 이 책이었다. 나는 곧 그 책을 구매했고, 함께 언급된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맥키의 《스토리》는 영어 파일을 구할 수 있었다. 방대한 양과 영어 문제로 아직 다 읽지 못했다.
픽션 작가들이 메시지라는 가루약을 스토리텔링이라는 달콤한 잼과 섞기 때문이다.
조너선 갓셜의 《스토리텔링 애니멀》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야기하는 존재로 본다. 진화는 무지막지한 실용주의자며, 픽션이 인간의 삶에 살아남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소설, 영화, TV, 가십, 공상 같은 이야기 속에 삶의 상당 부분을 보내는데, 이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마음의 기본 기능에 가깝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저자는 뇌가 서사를 통해 현실을 모의실험하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현실에서라면 대가가 큰 상황들, 예컨대 배신, 경쟁, 위험, 실수, 갈등, 사랑과 상실같은 것을 이야기 속에서 저렴하게 예행연습할 수 있다. 실제로 다치지 않고도 무엇이 위험한 선택인지, 어떤 행동이 관계를 망치는지, 누가 믿을 만한지, 어떤 규범이 집단을 안정시키는 지 같은 걸 픽션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는 실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사회적 상황, 위협, 도덕적 선택을 연습하게 해 주며, 그래서 문화와 시대를 넘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심리학, 신경과학, 진화론의 논의를 바탕으로, 허구는 인간 삶을 위한 일종의 비행 시뮬레이터처럼 작동해 공감 능력을 키우고 타인의 의도를 읽는 능력을 다듬으며, 집단이 규범을 공유하도록 돕는다고 말한다. 결국 인간이 픽션을 좋아하는 건 취향이나 문화적 산물이라기보다, 픽션이 인간의 생존과 사회적 적응에 이득을 주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거나 작거나 모든 종교가 다 그런 듯하다. 전통 부족들의 민담을 읽어보라. 부족과 사물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가 대부분일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영적 세계의 진리를 1번, 2번 따위의 목록이나 자기 계발서 풍 에세이로 전달하지 않는다. 이야기로 전달한다.
여기에 더해, 이야기가 집단을 묶는 방식도 중요한 점이다. 개인이 혼자 살아남는 게 아니라 무리 속에서 규칙을 만들고 협력해야 살아남는 종에게, 이야기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누가 영웅이고 누가 배신자인지, 어떤 행동이 칭찬받고 어떤 행동이 처벌받는지 같은 규범을 전파하는 빠른 매체가 된다. 픽션은 현실의 법 조항처럼 딱딱한 방식이 아니라 감정과 몰입을 통해 규범을 몸에 새기게 만들기 때문에 더 강하게 남는다.
백인 시청자가 코스비 가족처럼 흑인 가정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픽션을 보면 흑인을 대하는 전반적 태도가 대체로 더 긍정적으로 바뀐다. 반면에 백인이 (흑인 비하성의) 하드코어 랩 비디오를 보면 정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서사로 엮어 이해하고, 사회는 공동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결속시키거나 권력을 정당화하고 가치를 전승한다. 동시에 저자는 이야기가 유익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서사는 고정관념을 강화하거나 갈등을 부추기고, 복잡한 현실보다 매력적인 플롯을 더 선호하게 만들면서 현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이야기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동력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우리를 즐겁게 하고, 경험을 조직하며, 타인과 연결시키고, 우리가 믿는 것과 행동하는 방식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바꾼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 책에 매우 공감했다.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더라도 어떤 서사인지에 따라 전달력이 다르다. 요즘처럼 모든 가치에 이야기가 입혀져야하는 세상에서 이 책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 브랜딩을 준비하는 독자에게도 좋은 책이 되지 않을까?
달리 말하자면, 미래처럼 과거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 다 마음속에서 창조한 환상이다. 미래는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머릿속에서 돌리는 확률 시뮬레이션이며, 과거는 미래와 달리 실제로 일어났지만 우리 마음속에서는 마음 시뮬레이션으로 표현된다.
《스토리텔링 애니멀》, 조너선 갓셜, 민음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