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니엘 켈만(Daniel Kehlmann)은 독일어권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동시대 소설가 중 한 명으로, 역사적 인물과 지적 담론을 대중적인 서사 감각으로 엮어내는 데 강점이 있는 작가다. 그의 대표작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이 바로 《세계를 재다》와 《명예》다.
독일 팟캐스트 중에 《Alles Gesagt?》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다니엘 켈만이 출연한 적 있다.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팟캐스트를 켰는데, 다니엘 켈만 에피소드여서 반갑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Alles Gesagt?》는 독일 주간지 Die Zeit 에서 만드는 장시간 인터뷰 팟캐스트다. 크리스토프 아멘트와 요한 베그너 두 사람이 진행하며, 매회 한 명의 게스트를 초대해 삶, 일, 취향, 생각을 깊게 파고든다. 이 팟캐스트의 가장 큰 특징은 대화가 언제 끝날지 진행자가 아니라 게스트가 결정하는 데 있다. 게스트가 "이제 다 말했다 Ich habe alles gesagt"라고 선언하는 순간 인터뷰가 종료되는 규칙이다. 그래서 에피소드 길이가 매회 다르다. 실제 7-8시까지 진행된 초장편 회차도 있다.
그의 베스트셀러 《세계를 재다》는 독일에서 300만 부 이상 판매된 것으로 집계된다고 한다. 이 팟캐스트에서 문학, 특히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한 그의 애정, 그리고 가족사도 들려준다. 그가 출연한 팟캐스트를 듣고, 내가 좋아하던 책 소설가가 팟캐스트에 나왔는데... 어쩌고 저쩌고 남편한테 이야기하니,
"어? 그 사람 나 어렸을 때 살던 집 맞은 편에 살았는데."
다니엘 켈만이 이웃이었다고?!! 나는 흥분했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 빈을 방문하면서 그의 집도 지나가면서 볼 수 있었다. 그는 빈에서 철학과 독문학을 공부했으며, 현재는 베를린에 살고 있다고 한다. 사실 나의 이웃이 맞다.
오늘 리뷰할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라는 실존 인물을 중심으로, ‘세계/현실을 이해하려는 욕망’이 어떻게 탐사(현장)와 수학(사고)이라는 서로 다른 형식으로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켈만은 여기서 과학과 계몽의 진보를 단순 찬양하지 않고, 측정과 분류의 폭력성, 천재의 신경증적 면모, 시대가 개인을 규정하는 방식까지 함께 드러내면서 읽는 사람에게 웃음과 불편함을 동시에 남긴다.
문체와 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가볍게 읽히는데 읽고 나면 묵직하게 남는 쪽에 가깝다. 문장은 속도가 빠르고 대화가 살아 있으며, 장면 전환도 영화적이다. 그런데 그 경쾌함 속에 “우리는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식은 인간을 어디까지 자유롭게 하는가”, “역사는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되는가” 같은 질문이 계속 숨어 있다. 그래서 켈만 소설은 ‘지적인데 재미있는’ 쪽으로 자주 분류된다.
그러나 인간이란 원하든 원치 않든 우연히 어느 특정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에 갇혀 살아야 하는 딱한 존재이니, 이 얼마나 적절한 예냐. 과거와 비교해 보면 현재의 우리는 염치없을 만큼 유리한 입장에 있지만, 미래에서 보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거야.
훔볼트는 세계를 직접 몸으로 통과하며 기록하려는 사람이다.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탐사하며 지형과 기후, 식생을 측정하고 분류하고 지도에 옮긴다. 그는 무엇이든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에 가까운 태도로, 끊임없이 전진하고 채집하고 기록한다. 반대로 가우스는 이동과 모험을 싫어하고, 가능하다면 책상 앞에서 사고만으로 세계를 정리하고 싶어 한다. 그는 숫자와 공식으로 현실을 더 분명하게 만드는 사람이며, 사회적 관계나 공적 활동에는 서툴고 신경질적이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정교한 우주가 돌아간다. 소설은 이 둘을 단순히 대비시키지 않고, 각자의 삶에서 발생하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참함, 불안과 영광을 비슷한 밀도로 보여준다.
이 두 사람의 서사는 시간이 흐르며 점점 한 지점으로 수렴한다. 훔볼트는 끝없는 탐사 속에서 성공과 명성을 얻지만, 그의 삶은 인간적인 관계의 빈곤과 자기 몸을 혹사시키는 집착으로 점점 경직되어 간다. 가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천재로 추앙받지만, 개인사는 순탄치 않다. 가족과의 관계는 삐걱대고, 일상의 불편함과 분노가 잦다. 그럼에도 그는 수학적 통찰을 통해 세계를 다른 차원에서 재고, 현실의 혼탁함 속에서도 어떤 필연의 질서를 더듬는다. 결국 둘은 말년에 베를린에서 열리는 학회 같은 자리에서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은 두 천재의 화려한 충돌이라기보다, 각자가 살아온 방식의 어긋남과 시대의 공기 속에서 약간 쓸쓸하고 우스운 접점처럼 그려진다. 작품은 위인의 영웅담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평생 붙들었던 세계 이해의 욕망이, 다음 시대의 관점에서는 또 다른 한계와 오류로 보일 수 있다는 감각을 남기며 닫힌다.
이 소설은 수학을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로의 접근으로 그린다. 바르텔스가 말하듯, 어차피 세상에 태어나 살아야 한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기하학의 기초이며 필생의 사업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가우스의 수학은 초월적 천재성의 상징이기 이전에, 인간이 삶의 우연과 혼란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형태의 집중처럼 읽힌다. 수는 그를 현실에서 빠져나오게 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게 했고, 현실을 더 명확하고 분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세계를 잰다는 행위는 세계를 축소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견딜 수 있는 해상도를 높이는 일일 수 있다. 그것이 탐사의 측량이든 수학의 측정이든 말이다.
그 측정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사물들이 아직 측량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말은, 세계가 처음부터 숫자에 순순히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돌 세 개와 종이 세 장, 완두콩 15그램과 흙 15그램이 동일한 수와 동일한 무게로 바로 등치되지 않았던 감각. 그 차이를 밀어붙여 동일성으로 바꿔버리는 과정이 바로 근대적 측량의 역사다. 켈만은 이 장면을 통해, 세계를 재는 기술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인 동시에 세계를 지배하고 재구성하는 힘이기도 하다는 점을 은근히 비춘다. 그래서 작품 곳곳에서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는 분노가 사람들을 지배한다는 진술이 튀어나오는데, 이는 지식의 진보와 인간의 정념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훔볼트가 말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고귀한 일 같아요. 미래를 위해 현재의 덧없는 순간을 붙잡하 두는 최선의 작업으로 보입니다.
훔볼트가 소설을 고귀한 일로 말하는 부분은, 이 작품이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덧없는 순간을 붙잡아 두는 작업. 과학자들이 세계를 재는 방식과 소설이 세계를 붙잡는 방식이 겹쳐진다. 세계를 재다는 바로 그 붙잡기의 경쟁과 공존을 보여준다. 측량은 세계를 지도와 데이터로 남기고, 소설은 측량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우스움, 잔혹함, 불안, 환상을 시간 속에 봉인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과학 소설이면서도, 사실은 측정이라는 욕망 자체를 문학의 언어로 측정하는 소설이다.
정리하면, 세계를 재다는 위대한 과학자들의 업적을 알기 쉽게 재현하는 역사소설이라기보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행위가 언제나 거리의 문제이고, 우연과 필연이 뒤엉킨 인간의 사업이며, 그 과정 자체가 때로는 고귀하고 때로는 폭력적이고 자주 우스꽝스럽다는 사실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작품이다.
다음에는 그의 다른 작품 《명예》를 포스팅하겠습니다.
《세계를 재다》, 다니엘 켈만, 민음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