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책리뷰 12 《명예》 다니엘 켈만

by 팍초이 2025. 12. 17.

《명예》표지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말하는 걸 즐기지만, 많은 걸 경험한 사람은 느닷없이 할 말이 없어지는 법이라고 몇 년 전에 어느 노의사가 말했다. 

 

지난 포스팅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에 이어 오늘은 《명예》 책 리뷰입니다. 《세계를 재다》가 2005년에 쓰이고 《명예》는 4년 후, 2009년에 쓰였습니다. 2017년에 쓰인《틸》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이 책도 곧 읽어보고 싶네요.

 

다니엘 켈만의 《명예》는 하나의 주인공을 따라가는 전통적 장편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느슨하게 연결되며 점점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는 연작소설에 가깝다. 9개의 다른 이야기가 묘하게 얽히 설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제목 그대로 핵심은 명예다. 더 정확히는 명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대 사회에서 명예와 주목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며, 그 과정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어떻게 흔들리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작은 어긋남이 끼어드는 순간들에서 시작된다. 전화 한 통, 번호의 착오, 우연한 만남, 누군가의 소문 같은 사소한 사건이 인물의 삶을 엉뚱한 방향으로 밀어붙인다. 어떤 인물은 유명인의 이름과 이미지에 휩쓸려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고, 어떤 인물은 유명해지고 싶어 하지만 유명해진 뒤에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명예는 개인을 확장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낸 표면적인 자아로 사람을 고정시키고 압박한다.

 

여러 에피소드들을 관통하는 연결고리 중 하나는 작가 레오 리히터라는 인물이다. 그는 작품 안에서 다른 인물들의 삶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개입하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린다. 누군가의 불행이 누군가의 이야기 재료가 되고, 이야기가 다시 현실에 영향을 주면서, 우리는 어느 순간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정말 내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서사 속에서 소비되는 이미지인지 의심하게 된다. 이 구조 덕분에 명예는 유명인에 대한 풍자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 자체가 사람을 어떻게 만들고 망가뜨리는지까지 확장된다.

 

전체적으로 명예는 현대의 명성과 미디어 환경, 통신기기와 네트워크, 이야기의 전염성을 소재로 삼아, 정체성이 복제되고 분열되는 시대의 불안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웃기고 가볍게 읽히는 장면이 많지만, 읽고 나면 남는 감각은 오히려 서늘하다. 명예가 한 사람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타인의 욕망과 소비의 대상, 즉 교환 가능한 이미지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점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우리 월급쟁이들은 스스로 예술가와 무정부주의자, 자유로운 영혼, 은밀한 미치광이라고 느낀다. 강요도, 규범도 모르는. 우리 모두는 한때 절대 그런 부류에 끼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그 무리에 속해 버린 걸 깨닫지 못한다. 자신도 이젠 예외가 아니라며 다르고 싶어 하는 그 기분이 바로 자신이 아주 평범함을 말해 준다는 걸.

 

 

다니엘 켈만은 이 책에 대해 "잊히고, 사라지고, 자신을 잃어가고, 해체되는 것에 관한 책"이라고 말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 《시네도키, 뉴욕》이 떠오른다. 현실과 꿈, 내 인생과 다른 이의 인생이 섞여버리는 것. 이 영화도 언젠가 꽂혀서 4번 정도 관람한 것 같다. 재밌지만 다 보고 나면 헛헛한 기분이 드는 영화나 책을 좋아한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버 키터리지》와 정영수의 소설들도 떠오른다.

 

다음 리뷰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버 키터리지》를 소개하겠습니다. 

 

《명예》, 다니엘 켈만, 민음사, 2011.